사장 인터뷰

리소그래피의 진화와 기가포톤 - 와타나베 사장에게 듣는다

와타나베 사장님

이번에 당사 창립 10주년 기념 기획으로 와타나베 사장님에게 리소그래피의 진화와 함께 걸어온 발자취에 대해 들어 보았습니다. 인터뷰는 경영 기획실의 타카히사가 담당했습니다:

엑시머 레이저 여명기

와타나베 사장님, 당사는 2010년 8월 1일에 창립 10주년을 맞이했습니다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가포톤이 걸어온 길에 대해 사장님의 경험을 통해 들어 보고 싶습니다.

회사의 역사로는 10년입니다만, 당사의 기술 역사는 더 오래되었으며, 모체 중 하나인 코마츠에서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이상 전인 1980년대 전반에 세계 최초로 노광용 광원으로 엑시머 레이저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1984년에는 90Hz의 KrF 레이저 개발에 성공하여 양산화할 예정이었습니다. i선에서 엑시머 레이저로 전환되는 큰 기술 변화를 비즈니스 찬스로 생각한 것은 코마츠뿐만 아니라 NEC, 도시바, 히타치 등 일본의 하이테크 대기업이 잇따라 시장에 참가했습니다. 일본만 보더라도 10개사 정도의 엑시머 레이저 제조업체가 생겼습니다.

84년이라면 26년 전입니다만, 결국 엑시머 레이저는 당시 비즈니스로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래서 정부도 이 분야의 사업화를 위해 ArF 레이저 기술까지 내다본 9년간의 국가 프로젝트(1986-1994년)를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의 성과는 리소그래피용 엑시머 레이저의 실용화에는 그다지 활용되지 않았었죠.

엑시머 레이저 기술은 진보하고 있었습니다만, i선 램프의 개량이 그것을 능가하여 변함 없이 엑시머 광원의 시대는 오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개발 투자 회수의 전망이 서지 않았기 때문에 난립하고 있던 일본 국내의 각 경쟁사는 잇따라 철수했습니다.

선택과 결단

분명히 1995년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코마츠도 한 번은 철수를 기관 결정(주주총회, 이사회 등에서 내린 결정)했었죠.

그렇습니다. 그때 제게 주어진 임무가 기술과 인재를 다른 분야에 재배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기술, 시장, 인재에 대해 선입관 없이 객관적으로 평가하여 그 결과를 통해 방책을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조사하는 동안에 이 사업이 얼마나 유망한지가 부각되었습니다. 저는 그룹을 해산시키기 위해 일해 왔습니다만, 이 프로젝트를 중지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적극적으로 투자를 하고, 이 비즈니스를 성공시킬 시기에 와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때 사장님은 어떻게 회사에 설득했습니까?

회사의 방침과 완전히 다른 방향을 생각하기 시작한 셈입니다만, 각오를 다졌습니다. 일단 중지하도록 기관 결정(주주총회, 이사회 등에서 내린 결정)된 것을 원상태로 되돌리고자 한 이상, 면밀한 시장 분석, 기술 우위성의 입증, 그리고 이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임전무퇴의 결의. 이 3가지의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지 않으면 뒤집을 수 없습니다.

사장님은 엑시머 레이저에 참여할 때까지 새로운 사업을 출범시킨 경험이 사내에서 가장 풍부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물론 성공한 경험뿐만 아니라 실패한 경험도 많았으므로 실패 요인을 배제하는 노하우도 경험에서 익혔던 것은 사실입니다.

인터뷰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의견을 묻다 - 결단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준 2명

사장님도 어려운 판단을 내릴 때에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의견을 구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실제로는 어땠습니까?

저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사람이 2명 있습니다. 한 명은 저의 평가를 받는 입장이었던 사실상 프로젝트 리더인 미조구치 하카루 박사,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당시의 히타치 중앙 연구소의 리소그래피 권위자로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오카자키 신지 박사입니다.

미조구치 박사는 어느 날 저에게 단 둘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식사에 초대해 주었습니다. 그는 ‘어느 유명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제안해 와서 가까운 시일 내에 대답을 해 주어야 한다. 솔직히 말하면 엑시머 레이저 사업을 출범시키는 일을 하고 싶다. 엑시머 레이저 사업을 출범시키기 위해 한 번 더 마지막으로 기회를 만들어 주었으면 한다. 임전무퇴의 결의로 성공시키겠다.’고 진지하게 저를 압박해 왔습니다. 바로 답하지 않았습니다만, 내심 이것으로 앞에 언급한 3가지 조건 중 하나가 해결되었다고 확신했습니다. 실제로 그룹 내의 윤리도 높이 유지되었던 것에는 놀랐습니다.

엑시머 레이저 광원의 시대가 올지, 오지 않을지는 결단을 내리는 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습니다. 최종적으로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저의 경우는 오카자키 박사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는 ‘코마츠는 일본에서 제일 오래 전부터 엑시머를 개발하고 마지막까지 이 방침을 관철하여 노력해 왔다. 희생도 컸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일본에서 광원용 레이저를 제조할 수 있는 곳은 이제 코마츠밖에 없다. 여기서 철수하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됩니다. i선의 기술적 한계는 명백하고, 내일부터라도 엑시머 레이저 사업은 움직이기 시작할 상황이 되어 있습니다.’라고 저의 등을 밀어 주었습니다.

웬지 그때 사장님의 기쁜 마음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으로 최초의 조건인 ‘면밀한 시장 분석’도 해결한 셈이네요.

정말로 오카자키 박사의 조언은 기뻤고, 지금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생산 기술자로서의 경험을 세상에 묻다

이제 마지막 관문인 ‘기술 우위성의 입증’이 남았군요. 이것에 대해 사장님은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저의 의견을 주장했습니다. 레이저 그 자체의 우위성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습니다만, 일본 국내의 격렬한 경쟁에서 살아 남은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충분히 기술 우위성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 말씀은 다른 제조업체와의 경쟁은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신 셈이군요.

그렇습니다. 문제는 제품의 경제성이라는 가치관으로 본 제품의 강점이라 확신했습니다. 다시 말해 제품의 경제성이 높으면 시장 진입 속도는 빠르고, 낮으면 시장 규모는 확대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정적인 시장에 밀려 투자 회수가 불가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장님께서는 생산 기술의 전문가이시잖아요.

그렇습니다. 생산 기술자로서 생산장치의 사업화 속에서 제품의 신뢰성이 얼마나 경쟁력에 공헌하고 있는지를 직접 체험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당시의 담당 부서인 연구 본부의 오오가키 코지 본부장의 이해와 지원을 얻게 된 것을 계기로, 상황은 호전되기 시작하여 당시의 안자키 사토루 사장님도 마지막에는 방침 전환을 승인해 주셨습니다. 그때까지는 아직 코마츠 시절이었습니다만, 이것이 기가포톤으로 이어지는 일대 전환기였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때 미조구치 박사에게 강한 신념이 없었다면, 그때 오카자키 박사가 등을 밀어 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기가포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과거를 되돌아 보고 역사의 IF(가정)를 가끔 생각합니다.

인터뷰

고신뢰성으로 쟁취한 50%의 세계 시장 점유율

사장님은 제품의 신뢰성을 극적으로 개선하는 것이 사업의 발전을 약속하는 것이며, 고객의 지지를 얻게 되는 중요한 요소라고 항상 말씀하시고 계신데요.

실제로 이 신뢰성의 극적 개선을 조건으로 엑시머 레이저 사업의 재개가 결정되었으므로, 사실입니다. 1997년에 양산 공장이 완성되었습니다만, 이미 그해 말에는 과혹한 내구 테스트에 합격한 KrF 엑시머 레이저 G10K를 출하했습니다. 1년 동안 연속적으로 가동해도 전혀 고장이 발생하지 않는 레이저를 본 사용자 여러분은 그 성능의 숫자를 의심했습니다. 결국, 이 신뢰성의 극적 개선을 통해 운용 비용을 대폭적으로 절감하고, 고장률도 개선된 반도체 공장에서 안정적으로 가동하는 레이저로서 시장에 인지되었습니다. 이후 이 ‘고신뢰성’은 면면히 계승되어 우시오 전기와 코마츠의 합병 사업으로, 2000년 8월 1일에 기가포톤이 출범한 이래 벌써 10년이 지났습니다만, 오늘날에도 기가포톤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당사가 달성한 50%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고신뢰성의 증명이기도 합니다. 향후 기가포톤은 ‘고신뢰성’을 기치로, 리소그래피의 진화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 사용자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하는 길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2010년 9월 18일